고된 하루 버틸 수 있는 건, 오늘 뜬 저 태양 덕분[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13>

오현주 기자I 2021.12.04 00:01:01

▲모네·멘첼·그로스베르크가 들여다본 '공장'
새벽녘 고깃배와 공장 연기, 극명한 대비 만든 모네
쇳물과 힘겨루는 제철소노동자의 고단함 담은 멘첼
차갑기만한 사람 없는 작업공정 그린 크로스베르크
발전 거듭해 맞은 4차산업혁명, 우린 더 행복해졌나

아돌프 폰 멘첼이 1875년에 그린 ‘제철소’. 석판공의 아들로 태어난 영향이 컸다. 17세에 공방을 인수하며 판화가로 이름을 알려간 멘첼의 역작은 역사가 쿠클러의 ‘프리드리히 대왕전’에 들어갈 목판삽화 400여점(1842)을 제작한 일. 1835년경부터 시작한 회화는, 귀스타브 쿠르베의 영향을 받아 예리한 현실감각을 표현한 작품을 인상주의풍으로 그렸다. 뒤늦게 공장과 노동자 등에 관심을 가져, ‘제철소’에서 보이듯 규모가 크고 당당한 위용을 갖춘 ‘모뉴멘탈’한 표현을 꺼내들었다. 캔버스에 유채, 158×254㎝, 독일 베를린 알테 나치오날 갤러리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학예연구관이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클로드 모네(1840∼1926)의 ‘인상, 해돋이’(1872)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그림으로 인해 현대인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는 인상주의(Impressionism)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 사조의 명칭조차 이 그림으로부터 따왔으니 말이다. 당초에 ‘인상주의’라는 말은 비웃음의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림이 표현하는 것은 대상의 본질이어야 하는데, 이 그림은 도대체 흐릿한 ‘인상’만 남기고 있으니 뭐 볼 게 있느냐는 비아냥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그 인상주의자들은 이 말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대상에 있는 진실이 아니라 내 망막에 비치는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경계가 온통 불분명한 이 그림은 어쩌면 그리는 데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뚜렷이 보이는 것은 어슴푸레한 하늘에 붉은 태양, 바다에 비친 태양빛의 반영뿐이다.

가장 강렬하게 그린 태양빛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지만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면의 전경에는 노를 젓는 배에 두 사람이 탄 것이 확인된다. 그 앞에도 좀 더 흐릿한 배 두 척이 보이는데 이들은 새벽녘에 낚시를 나온 어부일 것이다. 이 그림을 논할 때 빈번하게 회자하는 건 거칠고 무너질 듯한 붓질이다. 그저 툭툭 화면을 건드리기만 한 물결의 표현과 대여섯 번의 붓질이면 완성할 것 같은 나룻배의 표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새벽안개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곳을 보면 증기가 뿜어나오는 굴뚝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여기는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 르 아브르다. 모네의 고향이기도 한 이 지역의 항구에는 조선소를 비롯한 각종 공장이 바다에 면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공장들은 19세기에 더욱 활발하게 지어져 르 아브르는 무역이 활발한 항만도시일 뿐 아니라 산업도시로도 각인됐다. 사물이 잘 분간되지 않는 안개 낀 새벽에도 뿜어나오는 공장 굴뚝의 연기가 그것을 증명한다. 모네는 의도치 않게 바다풍경을 그리려다가 작은 어선과 거대한 공장의 대비, 그러니까 전산업화시대와 산업화시대의 대비를 증명하게 됐다.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1872). 모네와 인상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그림이다. 화가들이 드디어 작업실에서 벗어나 야외의 빛을 따라 움직이는 순간·장면을 포착하는 그 전기를 마련했다. 여기에 더해 이후부터 풍경화는 야외를 그리는 게 아니라 사물이 남긴 인상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 됐다. 재빠른 붓질로 새벽에 깨어나고 있는 근대도시 르 아브르 항구를 그렸다. 캔버스에 유채, 48×63㎝, 프랑스 파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하지만 그림은 공장이 일터인 사람들과는 상관없는 화가가, 빛의 시시각각을 탐구하기 위한 시선을 담은 것임은 분명하다. 모네는 새로운 시대의 풍경, 그러니까 새로 건설되는 기차역, 현대적으로 정비된 거리와 고층 빌딩 등에 열광했으면서도 그 안에 보이는 사람들은 그저 풍경의 일부로 바라봤다. 모네뿐 아니라 스스로를 사실주의자로 칭했던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 역시 고되게 일하는 노동자를 간혹 그리긴 했지만 공장의 기계, 또 기계처럼 일하는 사람들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피·땀·눈물…쇳물 끓는 작업장서 맨발로 작업하는 사람들

반면 비슷한 시기 독일화가 아돌프 폰 멘첼(1815∼1905)은 공장 내부의 노동현장에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멘첼의 역작이라 할 ‘제철소’(1875)에서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멘첼은 이 그림을 위해 슐레지엔 지방의 제철소를 수십 번 방문해 인물의 동작 하나하나를 스케치했으며, 어마어마하게 방대한 스케치들에서 이 그림에 들인 정성을 엿볼 수 있다.

공장노동자들은 각기 다른 몸짓으로 기계와 한 판 싸움을 벌이는 것처럼 보인다. 한가운데에는 고온에 녹아 절절 끓는 쇳물이 있고, 그 앞에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큰 집게를 들거나 뜨거운 쇳물덩어리가 이미 튀어 떨어지는 바닥에 거의 맨발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른편에선 잠시 쉬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뜨거운 기계의 옆, 먼지와 연기로 뒤덮인 공장의 한구석에는 도시락을 싸온 젊은 여인이 그림 밖을 바라보며 우리와 눈이 마주친다. 여인 곁에나무둥치를 자른 간이의자에 음식을 놓고 손으로 집어먹는 사람, 먹다 말고 피로에 지쳐 잠깐 눈을 감은 사람,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병째 물을 들이켜는 사람도 보인다. 화면의 왼편에는 상의를 벗고 맨몸의 땀을 닦아내는 사람들이 보인다. 기계 앞에 서서 쇳물이 정련되도록 온갖 힘을 다한 사람들과 막 교대를 한 이들은 땀을 닦고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화면의 오른쪽으로 나와 여인들이 싸온 도시락을 먹을 것이다.

아돌프 폰 멘첼의 ‘제철소’(1875) 부분. 화가는 저 멀리 화면의 왼쪽 천장 아래 공장의 관리자 혹은 소유주로 추정하는 인물을 그려넣었다(왼쪽). 화면 오른쪽 먼지와 연기로 뒤덮인 공장의 한구석에는 도시락을 싸온 젊은 여인이 그림 밖을 바라보며 우리와 눈을 맞추고 있다.


이 그림이 말하는 바를 쉽게 단언할 순 없다. 당시 독일은 프로이센전쟁에서 프랑스에 승리하고 통일독일을 이룬 후 산업화와 부의 축적에 속도를 붙여갔다. 현대산업의 기초가 되는 제철공장이야말로 24시간 돌아가야 하는 기반산업이었을 것이다. 멘첼이 그린 이 제철공장도 그중 하나였다. 공장 건물을 외부인의 시선으로 그리는 대신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대단히 사실주의적인 태도로 그렸고, 뛰어난 데생력이 노동현장을 너무 생생하게 묘사해 공장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얼핏 보면 거침없이 돌아가는 공장이 조국 독일의 발전상을 강변하는 것 같지만, 그림 속 노동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척박한 삶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바로 이 남성이 일조를 했다. 그림의 저 먼 곳, 원근감의 소실점이 이르는 곳까지 따라가 보면 뒷짐을 진 채 공장을 둘러보는 중절모·신사복 차림의 남성이 보인다. 최소한 공장 관리자 혹은 소유주로 추정되는 그는 단지 둘러보고 있다. 공장이 잘 돌아가는지를 말이다. 여기서 멘첼의 갈등이 생겼을 거다. 위험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일하다 다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이들의 저편에 감시하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멘첼은 이 그림의 다음에도 공장 내부의 풍경을 그린 다른 그림들을 남겼는데, 이후에는 일하는 사람과 감시하는 사람의 대비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 농민의 일과는 달리, 노동자의 일은 시간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그는 집요한 관찰을 통해 발견해냈던 것이다.

◇감정도 온정도 없는…사람 손 없이도 잘만 돌아가는 기계

물론 공장에서 돌아가는 기계가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노동자들은 거친 노동을 기계의 자동공정에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노동자의 풍요로운 삶과 행복한 여가생활로 바로 이어지진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카를 그로스베르크의 ‘종이기계’(1934). 근대에서 현대로 급박하게 바뀌는 도시와 산업현장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본 그로스베르크는 기계뿐인 작업 공정을 무심하고 담백하게 그려냈다. ‘종이기계’를 비롯해 ‘중기보일러’ ‘터빈구성’ ‘자동차제작’ 등, 마치 공장견학이라도 간 듯한 한 컷 스틸사진 같은 화법이 특징이다. 캔버스에 유채, 90×116㎝,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


독일 화가 카를 그로스베르크(1894∼1940)는 1차대전 이후 절망도 희망도, 아무런 감정도 섞이지 않은 차가운 기계적 사실주의의 태도로 공장을 그렸는데, 그가 그린 공장에는 사람이 없다. 간혹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기계를 조작하는 아주 소수만이 거대하고 완벽하게 생긴 기계들 틈바구니에서 불완전한 유기체로 초라하게 존재할 뿐이다. ‘종이기계’(1933)는 사람 손 없이도 척척 돌아가면서 종이를 만들어내는 기계시스템을 그린 것이다. 화면이 전체적으로 싸늘하고 냉정해 아무 감흥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왜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신즉물주의(New Objectivity)로 불리는 일군의 독일 화가들은 공장의 기계를 그리면서 이토록 텅 비고, 일말의 환상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풍경이 바로 우리 시대의 얼굴이라고 봤다. 대단히 사실적이지만 어떠한 서사도 개입돼 있지 않은 불길함이 감도는 공장 풍경을 묘사한 그로스베르크의 작품은 지금 봐도 90년 전 그림 같지가 않다. 1930년대 공장에서 앞으로 다가올 인류의 미래를 봤을까. 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이제 4차 산업혁명을 말하는 인류는 그 덕분에 더 행복해질 것인가. 그의 그림 앞에서 의문은 더해간다.

△이윤희 학예연구관은…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지금은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으로 일한다. 일터에 나가면 미술작품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전시기획을 하고, 글을 쓴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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