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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이 지역에 산업단지를 구축해 이주민에게 취업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1969년부터 도심에서 광주대단지로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됐다. 이 지역 거주민 13만여 명(1971년) 가운데 원주민이 5000여 명이고 이주민이 12만 5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엔간한 중소 도시 규모 인구가 정부의 약속을 믿고 수년 동안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이다.
이주민의 삶은 열악했다. 이주를 우선한 정부와 서울시의 약속은 차일피일 밀렸다. 도로와 상하수도, 통신, 교통 같은 인프라는 없다시피 했다. 주택 2만 7000여 동 중에 천막·판잣집이 30%에 이르렀다. 판잣집이 허물려 이주를 왔는데 다시 판잣집에 사는 이들이 셋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주민 80%가 실업 상태였고, 경제활동인구의 23%가 일이 없었다. 일자리를 제공할 산업단지를 조성이 미진한 탓이었다.
지척에 있는 서울에 일하러 가고자 해도 대중교통과 도로가 부족해서 그러지 못했다. 서울과 광주대단지를 잇는 대중교통은 버스 몇 대에 불과했다. 1970년 초반 14만여 명으로까지 불어난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배차간격이 길었고 돌아가는 탓에 광주대단지에서 서울역까지 2시간30분이 걸렸다고 한다.
급기야 부동산 투기 열풍까지 불었다. 이주민은 이주 과정에서 가구마다 토지 십수 평을 염가에 분양받기로 했다. 그런데 서울 생활권을 누리지 못하다 보니 다시 시내로 이주하는 이들이 속출하면서 토지를 외부인에게 되판 것이다. 이래서는 이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생계에 허덕여 이 토지를 헐값에 파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이주민의 환경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서 굶주림에 아기를 삶아 먹었다’는 풍문이 돌 정도(고건 전 총리 회고록)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971년 6월 경기도는 이주민에게 토지 대금을 일시에 내라고 고지했다. 애초 평당 분양가는 2000원이었는데 고지서에는 평당 최대 1만6000원이었다. 당시 강남개발지역 평당 분양가가 1만2000원이었다.
이윽고 응축된 이주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1971년 8월10일 이주민 수만 명이 성남출장소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의 요구사항은 분양가 인하 및 분할 납부, 공장·상업시설 설치, 취업 제공 등이었다. 서울시장이 급거 성남파출소로 내려가 이주민과 협의를 시작했다. 회의장 밖에서는 성난 이주민 수백 명이 실력을 행사했다. 관공서를 습격하고 방화를 저질러 버스와 관용차량이 불에 탔다.
정부에서도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의 성격이 정치적이 아니라 생계형이었기 때문이다. 민심의 동요를 감지한 정부와 서울시는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하기로 했다. 1971년 8월12일 서울시장 양택식이 공개적으로 이런 입장을 확인하고 “성남시로 승격”를 발표했다.
정부가 1972년 8월 내놓은 광주대단지 종합개발계획에는 경기 광주군 4개 면과 용인군 수지면을 아우르는 성남시 승격안이 담겼다. 이에 따라 1973년 7월1일 성남시가 정식 행정구역으로 출범했다. 이주민은 원하는 바를 얻어냈지만 형사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가담자 22명이 구속돼 유죄가 인정됐다.
광주대단지 사건은 도시개발 사업의 큰 교훈을 남겼다. 이후 이뤄진 신도시 개발부터는 선개발-후입주가 원칙으로 굳어졌다. 성남시에 들어선 분당신도시가 이런 방식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