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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전세가 역전했다. 치열한 전투로 기록되는 장진호 전투(11월26일~12월13일)에서 유엔군은 수세에 몰리면서 뒷걸음질쳤다. 출구 전략은 오로지 함경남도 흥남시의 남쪽에 자리한 항구도시 흥남을 통해 해상으로 철수하는 것뿐이었다. 흥남을 제외한 함경도 지역은 북한군과 중공군 수중에 넘어가면서 육로로 철수는 불가능했다.
이런 전략적 판단하에 철수 병력이 흥남 부두로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피란민들도 군을 따라서 흥남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자유를 찾아 월남하려던 무고한 이들이었다.
철수 작전을 총 지휘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피란민을 배에 태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병력, 군사 장비, 폭약 등 싣고 가야 할 군수물자가 산더미였다. 물자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적군 전리품으로 군수 물자가 들어가면 전세가 위태해질 수 있었다.
아울러 피란민 사이 적군이 숨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철수까지 시한이 촉박한 가운데 수십만 명이나 되는 피란민을 선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흥남에 남겨진 피란민은 북한군의 보복을 받을 여지가 있었다.
국군의 김백일 국군 제1군단장과 통역 현봉학 박사가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였다. 현 박사는 훗날 한국의 쉰들러라는 칭호를 얻었다. 결국 알몬드 장군은 결정을 뒤집고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12월15일(출항 기준)부터 12월24일(해군 기준)까지 병력 10만여명, 차량 1만7500대, 군수물자 35만t, 그리고 피란민 9만1000여명이 해군 함정과 상선에 나눠타고 부산항과 거제 장승포항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미처 싣지 못한 군수물자 560만t은 철수 직후 폭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