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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 박정희정권 옭아맨 김대중 납치사건[그해 오늘]

김영환 기자I 2022.08.08 00:03:00

박정희 정부 중앙정보부, 김대중 납치 해 살인미수
국내 정치는 물론 국제적 입지도 축소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1973년 8월8일,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백주대낮인 오후 1시에 재야 정치인 김대중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중정)에 납치됐다. 유신체제를 반대하던 야권 정치인을 향한, 명백한 대한민국 정부의 테러였다.

일본에서 납치 이후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사진=김대중도서관)
도쿄 치요다구 소재 그랜드 팔레스 호텔 가장 위층인 2212호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본 정치인과 약속을 위해 나서던 김대중을 한국인 괴한 5명이 납치했다. 이 호텔은 일왕궁 옆 도쿄의 한복판에 위치했다. 이 곳에서 납치가 이뤄진 것이다.

김대중은 박정희의 유신 선포로 망명을 결심하고 일본에서 반정부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를 위협할 만큼 정치적으로 성장한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중정이 나서서 그를 납치하고 죽이려했다.

납치된 김대중은 공작선 용금호에 태워져 먼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간과한 게 있었다. 김대중의 위치를 미국 CIA가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한해협에 있던 김대중을 미상의 비행기가 찾아냈고 납치 129시간 만에 김대중은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풀려났다.

워낙 국제적 지탄을 받은 사안이고 이해관계가 엇갈려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다. 용금호를 찾아낸 비행기의 국적조차도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과 일본 모두 부인하고 있다.

무엇보다 납치를 지시한 상부가 어디인지조차 엇갈린다. 최고 권력자였던 박정희는 물론이고 중정 부장이었던 이후락도 명확한 진술을 하지 않았다. 이후락은 박정희의 지시를 암시했다가 추후 말을 바꿨다. 다만 중정이 깊숙하게 관여했던 것은 확실하다.

살인 미수에 그친 납치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은 안팎에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 대학을 중심으로 유신반대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고 종교인들도 개헌 청원에 나서는 등 반발이 거세졌다.

국제적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당장 일본부터 주권 침해를 당했다는 여론이 거세지며 한일관계가 악화했다. 북한도 남북 대화 중단을 선언했고 미국 역시 박정희 정권을 압박했다. 여담이지만 이 사건에 가담한 김기완 전 주일대사는 훗날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하는 성김의 부친이다.

김대중은 사건이 발생한 지 두 달 후에 “박 대통령이 지금 하고 있는 정치, 이래가지고는 절대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강력히 가지고 있다”면서도 “박 대통령을 포함해서 어떤 개인에 대해서도 내가 개인적인 원한이라던가 어떤 복수심은 영원히 갖지 않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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