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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역사에서 만나는 임진왜란의 역사
부산 지하철 수안역에 동래읍성뿌리길의 출발지점인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이 있다. 지하철역에 있는 역사관이라는 것도 특이하지만, 역사관이 생긴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2005년 지하철 수안역 공사현장에서 조선시대 동래읍성의 해자가 발견 된다. 해자란 성 밖에 땅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한 도랑이다. 해자가 발견되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해자가 있던 곳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뼈와 다양한 무기류가 출토 됐다. 수많은 인골과 무기류는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 현장은 일본군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선열들의 기상이 깃든 역사의 현장이었다. 선열들의 항쟁의 뜻을 기리고자 수안역에 동래읍성역사관을 세우게 된 것이다.
수안역으로 드나드는 문은 성문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 수안역 바닥에는 수자기(帥字旗)를 디자인해 놓았다. 수자기(帥字旗)란 장수를 뜻하는 수(帥)자가 적혀 있는 깃발을 말한다. 수자기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꽂는 깃발이었다. 조선시대 숙종35년(1709년)에 처음 그려진 그림을 1760년 변박이 다시 그린 그림 ‘동래부순절도(보물 제392호)’에서 수자기를 확인할 수 있다.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동래부사 송상현과 조선 병사들의 용기와 항쟁의 정신을 상징하는 깃발이 수자기였다. 그래서 수안역 바닥에 수자기를 새겨 넣은 것이다. 역사관에는 동래읍성 모형도 있다. 객사 향청 군영 무기고 동헌 내아 작청 성문 등의 이름이 붙은 단추를 누르면 불이 들어와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수안역 5번 출구로 나가면 전봇대에 동래부 동헌, 동래 장관청, 송공단을 알리는안내판이 붙어있다. 안내판에서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는다.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동래 장관청이다. 동래 장관청(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8호)은 조선후기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장관(軍將官)들의 집무소였다.
일본과 인접하고 있던 동래부는 국방상 요충지였다. 1655년(효종6년)에 독진(獨鎭)으로 승격됐다. 1669년(현종10년)에 동래부사 정석이 장관청을 창건했다. 1706년(숙종32년) 동래부사 황일하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이후 여러 차례에 개조하는 과정에서 원래의 모습과 많이 달라져 1998년 전면 해체한 뒤 복원했다.
동래 장관청을 보고 나와서 다음 목적지인 만세거리와 동래부 동헌으로 가야하는데 이정표가 안 보인다. 길을 물었더니 부산은행을 끼고 우회전해서 가면 된다고 한다. 친절한 부산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가다보니 만세거리 표석이 보인다. 표석 주변에 동래부 동헌과 동래시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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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거리와 동래부 동헌, 그리고 동래시장
만세거리를 알리는 표석에 따르면 만세거리는 옛 동래읍성 남문터~동래시장~동래구청~시민도서관 동래분관에 이르는 길목이다. 1919년 3월 동래고보(현 동래고)와 범어사의 학림명정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시민들이 함께한, 일제에 항거하고 독립을 외쳤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거리다. 만세거리 표석 옆에는 동래를 빛낸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비석들이 서 있다.
동래부 동헌으로 자리를 옮긴다. 동래부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이었다. 일본과 가까운 군사적 요충지였던 동래부를 두고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 때부터 진을 설치하고 국방을 튼튼히 했다. 명종12년(1547년)에는 도호부로 승격되어 정3품 당상관이 부사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효종은 1655년에 경주진관에 속해 있던 동래를 독립된 진영인 독진으로 독립시켰다.
임진왜란 이후 다시 일본의 군대가 우리의 땅에 발을 들인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부산의 역사가 깃든 동래부를 동래군으로 격하시킨다.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 현장에도 있었고, 만세거리에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동래시장에는 혼신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했던 선열의 기상처럼 오늘도 삶의 활력이 넘쳐난다.
시장 골목마다 왁자지껄 떠들썩한 소리가 가득하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들이 흥정과 웃음을 주고받는다. 좁은 장 골목 바쁜 걸음에 어깨를 스치는 일쯤은 아무렇지도 않다. 시장 건물 안도 사람들이 많다. 흥정에 배고파진 사람들이 식당으로 모여든다. 멸치육수에 양념장을 얹은 옛날 손칼국수와 김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이 많다. 큰 접시에 자기가 먹을 나물 종류를 담아오면 양푼에 밥을 담아주는데, 보리밥과 쌀밥을 섞어서 주기도 하고 보리밥만 먹을 수도 있고, 쌀밥만 먹을 수도 있다. 나물 얹은 고추장 비빔밥이다.
시장 건물 뒤에 다음 목적지인 송공단이 있다. 송공단으로 가는 길에 장 골목 다라에서 자맥질을 하던 물고기 한 마리가 펄쩍 튀어올라 길바닥에 떨어진다. 장 골목을 지나던 사람이 “이왕 그렇게 된 거 가서 방생하는 게 어떻겠냐”고 농담을 하자 주변 사람들이 다같이 웃는다. 그들의 웃음을 뒤로하고 송공단으로 향했다. 송공단은 1742년(영조18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세운 추념 제단이다. 원래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이 순절한 정원루 터에 설치했었다. 송상현을 비롯하여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사람들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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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재가 공존하는 마을
송공단에서 다음 목적지인 복천동고분군으로 가는 길 이정표가 없다. 다시 길을 물었다. 복천동고분군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차가 다니는 좁은 도로를 따라 가면 우성아파트 앞이 나온다. 거기서 우회전해서 조금만 가면 복천동고분군이다.
복천동고분군은 복천동 일대 언덕에 있는 가야 시대 무덤들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4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됐다. 무덤은 대부분 땅 아래 남아 있다. 언덕에는 무덤 봉분이 하나도 없다. 발굴한 무덤 자리 중 몇 곳에 키 작은 나무를 둘러 심어 무덤이 있던 자리를 알리고 있다. 이곳 무덤들에서 2000점 이상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복천동고분군은 낮은 언덕처럼 보인다. 그곳이 고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마을에 있는 언덕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분 곳곳에 나무가 자라고, 길을 냈다. 나무가 있는 언덕길에서 사람들이 산책을 즐긴다.
복천동고분군에 난 길을 따라 복천박물관에 도착했다. 복천박물관 제1전시실은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무덤의 형식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제2전시실에는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을 확인할 수 있다.
복천박물관에서 나와 동래읍성역사관에 도착했다. 동래읍성에 관한 자료를 보고, 동래읍성 축소모형을 보며 동래읍성의 위치와 지형을 알아본다. 동래읍성역사관 뒤에 장영실과학동산과 내주축성비, 그리고 동래읍성뿌리길 도착지점인 동래읍성 북문이 있다. 장영실과학동산에서는 해시계, 간의, 혼천의 등 장영실의 업적이 담긴 고천문의기들을 볼 수 있다.
내주축성비는 1731년(영조7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동래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다. 비석 내용에 따르면 1731년에 성터를 측량하고 연인원 41만7050명, 쌀 4585석, 베 1552필, 전(錢) 1만3454냥으로 4월에 성벽을 축조했다. 이어 5월에 성문, 7월에 문루를 완공했다. 이때 완성된 성은 둘레 약 3.8km, 높이 5.1m였다.
내주축성비를 지나 도착지점인 동래읍성 북문에 올랐다. 장영실과학동산, 동래읍성역사관, 복천동고분군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과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여행메모
△코스 요약= 수안역 안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동래 장관청∼만세거리 표석∼동래부 동헌∼동래시장∼송공단∼복천동고분군∼복천박물관∼동래읍성역사관∼장영실과학동산∼동래읍성 북문. 2.3km, 소요시간은 30~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