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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19일 혁명이 일어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렸다. 사업을 접고 도망하다가 1961년 4월 김구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에 잡혀 검찰에 넘겨졌다.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들어 안씨를 처벌하지 않았다. 국민 여론이 들끓었다. 이후 안씨는 잠행하고 신분을 숨기고 살아갔다.
안씨에게 첫 사적 제재가 가해진 때는 1965년 12월이다. 강원 양구군에서 29세 청년 곽태영씨로부터 신체 주요 부위가 칼에 찔리는 피습을 당했으나 구사일생했다.
그에게 두 번째 테러가 일어난 건 1987년 3월이다. 서울 마포구청에서 백범기념사업회 소속 권중희씨가 휘두른 각목에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 사건일 발생 직후 또 다른 시민이 안씨의 집으로 찾아가 유리창을 부수기도 했다. 그해 7월 회사원 노모씨로부터 각목 테러를 당했다.
안씨는 테러 위협을 피해 아예 한국을 뜨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1974년 미국 이민 시도는 여권이 나오지 않아 불발했다. 먼저 도미한 장남의 가족 자격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고 비난 여론이 일자 정부에서 여권을 내어주지 않았다. 1981년 이민 여권을 발급받았지만, 미국에서 비자를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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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0월23일 생을 마감했다. 버스를 운전하던 시민 박기서씨가 휘두른 정의봉에 맞아 살해당했다. 박씨는 범행 직후 경찰에 자수하면서 “정의는 살아 있다”고 외쳤다. 대법원은 1997년 11월 “살해는 어떤 수단이나 목적이든 정당화할 수 없다”며 징역 3년을 확정했다. 살인죄의 최저 형량(5년 이상)보다 낮았다. 박씨는 1998년 3·1절 특사로 사면돼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