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이들은 ‘정부가 우리를 섬에다 가두고 죽이려 했다’며 ‘모든 일의 원흉인 박정희를 죽이겠다’고 말하며, 자신들의 목적을 분명히 했다. 이들은 바로 북파공작을 목표로 훈련을 받던 공군 684부대 소속 부대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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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실제 청와대로부터 300m 지점인 종로 세검정고개까지 침투에 성공했다가 이후 발각돼 총격전을 벌여 29명이 사살되고 1명이 북한으로 도망쳤으나, 나머지 1명인 김신조는 투항했다. 김신조는 하루 뒤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에 대해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는 발언으로 남한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김신조 침투’ 복수 위해 창설…기약 없는 지옥훈련
박정희정권은 결국 이에 대응해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한 특수부대 3개를 창설했는데, 684부대는 공군 산하에 창립돼 실미도 비밀 훈련 기지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됐다.
하지만 1970년대 초 국제적으로 미국과 소련 간 긴장완화 분위기인 데땅트가 조성되고, 이에 발맞춰 남북 역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며 684부대의 창설 목적은 방향성을 상실해갔다.
3년간 이어진 강도 높은 훈련이 기약 없이 계속되고 처우마저 나빠져 불만이 고조되던 시점에 부대원들 사이에선 “보안유지를 위해 부대원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고, 결국 이들은 박 전 대통령과 담판을 짓겠다며 탈주에 나서게 됐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버스를 탈취하고 서울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은 곧장 빠르게 퍼져나갔다. 정부는 이들을 비밀 부대원이 아닌 ‘무장공비’로 간주해 대응했다.
정부는 서울 대방동 현 유한양행 건물 앞에서 육군과 경찰을 동원해 이들을 저지했다. 부대원들은 포위망이 좁혀오자 버스 안에서 수류탄으로 자폭했다. 이중 4명을 큰 부상을 당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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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겠다” 약속에 생존 부대원 침묵…결국 사형
생존한 부대원 4명은 결국 정부로부터 버림받았다. 이들은 국회 진상조사를 앞두고 군으로부터 “보안상 절대 말할 수 없다고 하면 살 수 있다”고 회유를 받았다.
결국 국회 진상조사에서 ‘역할’과 ‘업무’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비밀사항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며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결국 이들 4명 1972년 1월 모두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고 같은 해 3월 사형집행으로 생을 마감했다.
김병업 대원은 사형 집행 전 유언으로 “살아생전 국가에 대해 말도 못하고 죽어가는 게 아깝습니다. 제가 죽더라도, 집에 알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서천 대원은 애국가를 부른 후 “국가를 위해 싸우지 못하고, 국민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죽는 게 억울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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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부대원들을 범죄자 출신으로 각색해 이후 역사 왜곡 논란을 야기했다. 실제 부대원들 대부분은 평범한 청년들로 선발된 인원들이었다. 결국 영화 개봉 후 유족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실미도유족회는 국방부에 이들 부대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함께 사형 당한 4명의 암매장 위치를 찾아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