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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조선은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과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서 개항하게 된다. 임규태 박사는 “프랑스, 미국의 압박에도 쇄국을 고집했던 흥선대원군이 일본에 개항을 허락한 이면에는 북양함대를 거느린 청나라의 이홍장의 조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홍장은 아편전쟁에서 청나라가 힘없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강력한 군사력을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양무운동을 전개하고 북양함대를 건설했다. 당시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아시아 최강의 함대로 명성이 높았다. 흥선대원군 또한 이홍장의 북양함대 지원을 믿고 외세에 문호를 개방했을 것이란 의견이다.
북양함대는 독일, 프랑스 등에서 철갑함, 순양함, 어뢰정 등을 구입해 만든 신식함대였기 때문에 유지와 군사 훈련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안팎으로 시달리던 청나라의 경제 상황에서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결국 무늬만 아시아 최강함대로 전락했다. 결국 아시아 최강이라는 북양함대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해군에 대패했고, 청나라는 쇄락의 길을 걷는다.
청나라를 굴복시킨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요동 반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팽호 제도를 할양받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와 요동반도 점령을 꺼렸던 러시아는 독일, 영국과 연합해 일본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는 ‘삼국간섭’을 주도한다.
서구열강의 외교적 압박에 무릎 꿇은 일본은 이때부터 66함대 계획을 수립했다. 66함대 계획은 1896년부터 1905년까지 10년 간 전함 6척, 순양함 6척을 중심으로 대규모 함대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였다. 러시아 등 서양열강과의 군사력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 해군력을 강화한 것이다.
66함대 계획의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1904년 일본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해군을 격파한다. 그 이면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의 원조도 큰 역할을 했다. 1905년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병탄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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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박사는 “조선은 배를 만드는 기술에 뛰어난 무기를 만드는 기술도 있었는데 4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했다. 이어 “미래는 망망대해와 같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고 당부하며 강연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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