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류성 산업선임기자] “1년 앞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으면 임원, 3년 앞까지 내다보면 최고 경영자.”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기업환경이 갈수록 급변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마저도 매년 경영계획을 짤 때 길어야 3년 앞까지로 시야를 좁힌다. 5년, 10년 후는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이런 와중에 100년 앞을 내다보고 연구·개발을 지속해 큰 결실을 맺고 있는 기업이 있다. 가히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세계적 화학·제약 업체인 머크가 액정(液晶)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지난 1904년. 당시 액정은 쓸곳이 없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었다.
그럼에도 미래 시장성만을 보고 100년 간 연구·개발을 지속한 끝에 지난 90년대 말부터 빛을 보고 있다. 지금은 머크가 없으면 삼성전자(005930), LG전자(066570)가 스마트폰· LED TV 를 만들지 못할 정도로 세계 액정시장에서 독보적 위치를 자랑한다. 액정은 LED TV나 스마트폰,노트북 PC 등에 들어가는 핵심 소재다.
지난 1668년 독일에서 조그만 약국으로 출발, 오늘날 세계 화학·제약업계에서 ‘최고(最古)’와 ‘최고(最高)’라는 두 타이틀을 거머쥔 머크. 머크의 성공 사례는 변혁기를 맞고 있는 국내 기업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 100년간 수익은 커녕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며 연구활동을 뒷받침한 머크 그룹의 ‘뚝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 이익보다는 다음 세대를 위한 사업 구상이 머크가(家)의 가장 중요한 경영 활동이다.” 머크 그룹의 모기업인 E. 머크 KG의 프랭크 스탄겐베르그 하버캄 대표의 경영 철학은 우리네 경영의 시간적 사고영역을 초월한다.
머크그룹의 미래 지향적이고 안정적인 경영 시스템도 타산지석(他山之石 )으로 삼을만하다. 머크그룹은 프리드리히 야콥 머크가 344년 전 창업한 이래 13대를 거치면서도 탄탄한 경영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그 비법의 정점은 ‘주식합자회사’다. 주식합자회사는 주식회사와 합자회사를 합한 형태. 최고 경영진이 유한책임에 그치는 주식회사와 달리 주식합자회사는 무한책임을 진다.
머크는 전문 경영인이 퇴임 후 5년까지 재임 시 발생한 일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다. 단기 성과에만 취중할 수 있는 전문 경영인 제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다. 장기적 성과를 중시하면서 100년간 지속될 수 있는 기업 연구문화가 자연스럽게 뿌리내린 비결이다.
여기에 상장돼 있는 주식합작회사인 머크 KGaA를 머크 일가가 100% 소유한 E.머크 KG를 통해 지배하는 안정적 가족경영 형태도 일조를 한다. 단기 수익보다는 세대를 뛰어넘는 사업의 영속성을 우선시하는 머크가의 경영철학이 사업에 그대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들마다 미래 전략사업으로 태양전지, 전기차 배터리, OLED 등 주로 친환경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이 선택한 품목 중 100년 후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어렵지만 우리 기업들이 ‘천년 장수기업’으로 존속하려면 경영 시야를 3년, 5년 후가 아닌 100년 이상으로 확대하는 발상과 기업 구조의 혁신이 절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