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3일 조기 대통령선거를 앞둔 한국은 협상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며 ‘질서 있는 협의’로 교두보를 쌓아가는 전략을 택한 반면, 한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들과 협상을 벌여야 하는 미국은 ‘관세폭탄’을 무기로 단기간 내에 성과를 내기 위한 ‘전격전’식 타결을 압박하는 모양새다.
앞서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70개 가까운 국가가 협상을 위해 미국과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협상은 단순히 관세 철폐 여부를 가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트럼프 정부뿐 아니라 이후 미국과 통상교역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에서, 협상 결과에 따라 산업 전반에 파장이 이어질 전망이다.
교두보 구축 나선 한국…‘속도 조절+전략적 유예’로 대응
4월 24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첫 2+2 통상협의에서 우리 정부는 자동차·반도체 등 우리나라 수출 주력 품목에 대한 미국의 고율 관세가 양국 모두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중점적으로 설명했다.
우리 정부는 관세 철폐를 포함한 해법 마련을 위한 실무 협의와 고위급 논의를 병행하되, 속도보다는 구조적 기반 마련에 방점을 둔 협상 프레임을 제시했다.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는 회의 후 “차분하고 질서 있는 협의를 위한 인식을 공유했다”며 협상의 기본 틀(scope)과 일정(schedule)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 데 의의를 뒀다고 밝혔다.
국내 정치 일정을 고려한 속도 조절이다. 협상 테이블에는 앉겠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은 6월 대선 이후 새 정부에서 내리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조선, LNG, 에너지 등 미국이 필요로 하는 산업 분야에서의 협력방안을 제안해 양보를 받아낸다는 전략이다. 특히 미국 정부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와 미국 조선업 재건에 한국의 기술과 투자를 연계하는 협상용 카드를 앞세워 관세 철폐를 위한 ‘패키지 딜’ 접근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과 급한 美…“A게임 들고 와라” 속도전 드라이브
미국은 단기적인 협상 성과 도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대상으로 통상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만큼, 개별 국가와의 협상이 장기화하는 국면이 이어지면 정치·경제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동맹국 중 무역적자가 큰 한국과 일본이 협상 1순위다. 케빈 해싯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가장 긴밀한 동맹이자 교역 파트너 중 일본과 한국을 분명히 우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2 협상 직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한국 측은 A게임(최선의 카드)을 가져왔다. 이행 여부를 보겠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이르면 다음 주 양해에 관한 합의에 이르면서 기술적인 조건들에 대해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보 문제 등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양보를 받아내기 유리한 동맹국인 한국, 일본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이를 기준점 삼아 다른 나라들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속도전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은 자동차·철강에 이미 25% 고율 관세를 부과한 상황에서 이를 지렛대로 클라우드, 지도 데이터, 농축산물 시장 개방, 방위비 등 비관세·비통상 분야까지 협상 범위를 확대하려는 기류다. 미국은 “한 번에 끝내는 포괄적 협상(원스톱 쇼핑)”을 전제로, 각종 규제 해소 및 투자 확대를 관세 철폐의 조건으로 연계하려는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과의 전화통화에 대한 게시물을 SNS에 올리면서 협상 테이블에 무역·관세와 무관한 사안도 논의할 것이라며 “‘원스톱 쇼핑’은 아름답고 효율적인 과정”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디지털 무역 장벽, 특히 한국 공공기관의 해외 클라우드 제한, 국산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 금지 등은 미국이 집중적으로 제기한 이슈다. 이들 사안은 정보주권, 산업 보안 등 민감한 주제와 연결돼 있어 협상 막판까지 쟁점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
이번 협상의 향방을 가를 주요 관전 포인트는 크게 넷이다.
첫째, 한국이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는 자동차 관세 문제는 면제 조건, 적용 범위와 시점 등에서 미국 측과의 입장 차를 좁혀야 한다. 둘째, 디지털·데이터 관련 비관세 장벽 완화 요구를 어느 수준까지 수용할 것인가도 관건이다.
셋째, 관세 철폐와 연계해 제시한 LNG·조선 산업 협력 패키지도 관심사다. 미국의 조선업 재건이라는 전략적 목적과 한국 조선사의 기술력, 자본을 어떻게 매칭하느냐에 따라 양국의 ‘윈-윈’하는 카드가 될 수 있지만, 생산 기반의 미국 이전 등 불리한 조건으로 타결이 이뤄지면 조선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넷째, 일단 기획재정부와 미국 재무부 간 별도 협의로 진행하기로 했지만, 환율 정책 문제도 언제 다시 쟁점으로 부상할지 모를 변수다. 외환시장 개입 투명성 문제, 원화 가치의 경쟁적 평가절하 자제 등의 원칙이 7월 패키지에 어떤 형태로든 포함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울러 이번 1차 회의에서 논외로 된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나 한미 FTA 재협상 문제가 향후 협상 말미에 다시 떠오를 가능성도 열려 있다. 대선 이후 새 정부와의 협상 테이블에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등판할 경우, 이를 전략적으로 꺼내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여한구 미국 피터슨 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이데일리 주톡피아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1기 집권 당시 추진했던 방위비 협상이 바이든 정부로 넘어가면서 타결된 내용에 대해 공공연하게 불만을 표시해 왔다”며 “한미 통상협상은 개별 협상이 아닌 국방과 경제, 안보를 모두 종합적으로 고려한 협상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