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신탁계약서에 ‘관리비는 위탁자가 부담한다’는 조항이 있고, 이 계약서가 등기사항증명서의 일부인 ‘신탁원부’에 기재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최근 이 쟁점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 대법원 판결(2022다233164)이 선고되어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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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신탁회사는 “신탁계약서에 관리비 등 모든 비용은 위탁자가 부담하기로 약정했고, 이 신탁계약서가 신탁등기 시 신탁원부에 포함되어 등기되었으므로, 우리는 관리비 납부 책임이 없다”고 항변했다.
제1심과 항소심 법원은 신탁회사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신탁계약에서 관리비 부담 주체를 위탁자로 정했고, 이 내용이 신탁원부에 기재되어 등기의 일부가 된 이상, 수탁자인 신탁회사는 제3자인 관리단에게 ‘관리비 책임은 위탁자에게 있다’고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과거 대법원 판결(2012다13590)의 입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관리단의 청구는 기각되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돌려보냈다. 핵심 이유는 2012년 7월 26일부터 시행된 개정 신탁법 제4조 제1항의 해석에 있었다.
개정 신탁법 제4조 제1항은 “등기 또는 등록할 수 있는 재산권에 관하여는 신탁의 등기 또는 등록을 함으로써 그 재산이 신탁재산에 속한 것임을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대법원은 이 조항의 취지를 ‘신탁된 재산이 수탁자의 고유재산과 구별되는 독립된 신탁재산임을 제3자에게 주장(대항)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즉, 신탁 등기의 효력은 해당 부동산이 ‘신탁재산’이라는 사실을 제3자에게 알리는 데 중점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탁계약의 세부 내용, 예를 들어 ‘위탁자와 수탁자 사이의 관리비 부담 약정’과 같은 내부적인 합의 사항까지 신탁원부에 기재되어 등기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제3자에게 무조건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대법원은 하급심이 근거로 삼았던 대법원 2012다13590 판결은 개정 전 구 신탁법이 적용된 사안이므로, 개정 신탁법이 적용되는 이 사건에는 원용하기 적절하지 않다고 명시적으로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수탁자인 신탁회사는 신탁원부에 ‘관리비는 위탁자 부담’이라는 내용이 등기되어 있다는 사정만으로는 제3자인 관리단에 대한 관리비 납부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이번 대법원 판결의 요지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개정 신탁법 하에서 신탁 등기의 대항력 범위를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집합건물 관리단 입장에서는 앞으로 신탁 부동산의 관리비 체납 시 신탁원부 기재 내용과 상관없이 등기사항증명서상 소유자인 수탁자를 상대로 관리비(특히 공용부분 관리비 등)를 청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더욱 명확해졌다.
둘째, 수탁자인 신탁회사 입장에서는 더 이상 신탁원부의 내부 약정 등기 사실만 믿고 관리비 납부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게 되었다. 물론 수탁자는 신탁계약에 따라 최종적으로 위탁자에게 관리비 부담을 전가하거나 구상권을 행사할 수 있겠지만, 이는 내부적인 문제일 뿐, 대외적으로는 관리단 등 제3자에게 관리비 지급 책임을 부담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셋째, 이 판결은 위탁자와 수탁자 간의 내부 약정이 신탁원부에 등기되더라도 그 효력이 제3자에게 미치는 범위는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신탁 등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해당 재산이 신탁재산’임을 공시하여 수탁자의 다른 재산과 분리하고 신탁재산을 보호하는 데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것이다.
따라서 신탁 부동산과 관련된 당사자들, 특히 관리비 징수 주체인 관리단과 수탁자인 신탁회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관리비 문제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수탁자는 위탁자와의 신탁계약 체결 시 관리비 부담 및 정산에 관한 사항을 더욱 명확히 하고, 위탁자의 이행을 담보할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도 커졌다.
■하희봉 변호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제4회 변호사시험 △특허청 특허심판원 국선대리인 △(현)대법원·서울중앙지방법원 국선변호인 △(현)서울고등법원 국선대리인 △(현)대한변호사협회 이사 △(현)로피드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