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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해석 사이의 ‘가능한 사랑’[정덕현의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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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기자I 2026.10.08 05: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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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을 탐하는 네 사람의 욕망
타인의 고통을 카메라에 담을 때
관심과 사랑은 착취가 될 수 있다
이창동이 묻는 창작과 재현의 윤리

사실과 해석 사이의 ‘가능한 사랑’[정덕현의 끄덕끄덕]
[정덕현 문화평론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 이창동 감독의 영화 ‘가능한 사랑’은 그런 십계명의 문구로 문을 연다. 젊은 시절 예술 영화 좀 봤던 관객이라면 키에슬롭스키의 ‘십계’ 연작을 떠올렸을 자막이다. 실제로 이 영화는 그 연작의 헌정 기획으로 만든 영화다. 본래 키에슬롭스키 연작 9부는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인데 이창동 감독은 이걸 ‘남의 것’으로 바꿨다. 당연히 영감은 받았지만 이야기는 다르다.

‘가능한 사랑’에는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쌍용자동차 사태’를 떠올릴 폭력적인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은 노동자 호석(설경구)과 미옥(전도연) 부부가 등장한다. 동생들과 치열한 옥쇄 투쟁을 했지만 공권력을 동원한 강제 해산으로 호석은 결국 실직했고 그로 인한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트라우마로 갖게 됐다. 특히 형 동생하며 지냈던 동료들이 강제 해산 앞에서 도망치는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 ‘연대’라는 말에도 염증을 느끼게 된 호석이다. 그들에rp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와 그녀의 남편 상우(조인성)가 다가온다. 그들은 한 마디로 잘먹고 잘사는 상류층 사람들이다. 하지만 예지는 호석과 미옥 같은 노동자들의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큐에 담아내려 하고 성공한 사업가인 상우는 그런 그녀의 예술(?) 행위를 마치 가진 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이자 훈장처럼 여기며 도우려 한다. 예지가 호석과 미옥 부부를 다큐에 담으려는 건 그래서 해고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과 상처를 널리 알리기 위한 행위처럼 보이고 이를 도와 그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서해안 개인 별장에 초대하는 상우의 행위 또한 순수한 호의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부부 사이에 놓인 계급적 차이는 이들의 행위에 ‘타인의 것에 대한 욕망’을 끼워 넣는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문구는 이 서로 다른 계급과 처지에 놓인 부부 사이에 파생된 이런 욕망을 경계하는 말이 된다.

무언가를 탐한다는 건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내게 없는 것이기 때문에 남의 것을 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네 사람은 무얼 탐하고 있고 그 결핍은 무엇일까. 호석은 강제 해산을 겪으며 삶은 물론이고 관계가 파괴됐다. 직장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동료들과의 관계도 깨졌다는 것이다. 그가 탐하는 건 자신의 삶 자체다. 이런 일 자체를 겪지 않고 아무 걱정도 없이 살아가는 예지와 상우 부부를 보며 그는 불편함과 동경을 같이 느끼는 낯선 감정을 갖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화장실에 아무렇게나 오줌을 갈겨대도 이를 그저 하나의 낭만처럼 여기며 웃어넘길 수 있는 상우의 여유가 그는 부러우면서도 불편하다. 미옥 역시 자신이 갖지 못한 예지의 부유함에 불편함이 섞인 속물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오면서도 수백만원짜리 가방과 옷을 입고 오는 예지를 부러워한다.

영화 '가능한 사랑'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영화 '가능한 사랑' 포스터. (사진=넷플릭스)
그런데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예지와 상우는 어떤 결핍이 있고 그래서 무얼 탐하는 걸까. 다큐 감독이지만 극영화 감독을 꿈꾸는 예지는 자신에게는 없는 이 노동자 부부의 고통을 탐한다. 그 고통을 다큐에 담아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고통을 느낄수록 자신의 작품이 빛난다는 걸 안다. 또 상우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수집해 놓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고 심지어 발가벗고 수영을 할 수 있는 프라이빗한 해변까지 있는 개인 별장이 있을 정도로 잘 살고 있지만 그래서 진짜 자신의 전리품(?)을 갖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예지와 그녀가 찍는 다큐는 그래서 상우에게는 매력적인 전리품이 된다.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빼앗아 자신들만의 예술로 만드는 일이 아닌가. 물론 예지와 상우 부부의 이런 욕망은 악의적이지는 않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상황에서 하려는 일들이 타인에게 그런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남의 것을 탐하는 그 욕망은 어떤 결과를 만들었을까. 이들의 욕망은 개인 별장에서 함께 지내며 하던 인터뷰가 도중에 끝장남으로써 실현되지 못한다. 이런 변화가 생겨난 건 어느 새벽녘 바닷가 숲에서 호석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모습을 숨어서 바라보다 돌아선 미옥이,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는 예지를 발견하면서다. 그 순간 미옥은 알게 된다. 예지와 상우 부부의 호의는 사실상 자신들의 고통을 ‘탐하는’ 저들의 욕망이었다는 걸. 화가 난 미옥은 자신들이 저들의 전리품이 되지 않겠다는 걸, 상우의 개인해변에서 도발적인 행위로 보여준다. 결국 이 두 부부는 그 길로 갈라져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문구는 자본시장의 노동에서 주로 ‘착취’의 의미로 쓰인다. 이 영화에서도 호석이 처한 노동자의 고통은 바로 그 자본이 이용하다 버리는 ‘착취’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영화가 특별하게 여겨지는 건 그 ‘착취’에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영상 제작자’들의 윤리 문제와 더불어 사실과 해석이라는 보다 철학적인 문제까지 담고 있다는 점이다. 찍는 자와 찍히는 자 사이에 놓인 예술과 착취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영화는 노동자 부부와 예술가 부부의 팽팽한 긴장과 대결로 보여준다. 나아가 똑같은 하나의 사실도 이를 바라보는 자의 해석에 따라 다르게 취해질 수 있고 그 해석이 때론 착취적일 수 있다는 것도 이 영화가 흥미롭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똑같은 달이라고 해도 예지가 유학 중 봤던 달과 미옥이 남편과 함께 소주를 기울이며 보는 달은 의미가 다르다. 무언가를 주의 깊게 본다는 건 관심이고 사랑일 수 있지만 거기 끼어드는 관찰자의 욕망(해석)이 그 실체(사실)에 달무리 같은 흐릿함을 만든다. 그 사랑의 가능함을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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