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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그대에게…놀멍쉬멍 제주올래 폭삭 속았수다”

이지현 기자I 2025.04.23 05:45:00

■예종석의 파워인터뷰-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시사저널 등 기자생활 25년 만에 찾아온 번아웃 직면
산티아고순례길은 ''행복 종합병원''..치유의 길 만들고 싶어
조단위 가치 ''K-올래'' 수출..日 등 국제개발협력 모델 성과

우리 사회의 따뜻한 온정을 위해 공헌하고 있는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명사들과의 릴레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공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통찰과 영감을 제공할 계획입니다. <편집자 주>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예종석의 파워인터뷰에 답하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대담=예종석 명예대기자(한양대 명예교수)·정리=이지현 기자] “육체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주름 등 중력의 법칙을 어길 수 없겠지만 마음은 먹기 나름, 몸은 훈련하기 나름이더라.”

환한 웃음과 함께 건네는 서명숙(67) 제주올레 이사장의 말 속에는 삶의 풍파를 겪고 일궈낸 깊은 지혜와 여유가 배어 있었다. 국내 최초 여성 시사주간지 편집장이라는 화려한 이력을 뒤로하고 그는 지금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적인 트래킹 명소로 자리매김한 ‘제주올레길’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서 이사장은 22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언론인 시절에는 1~2년 기억될 특종을 쫓았다면 지금은 100년, 1000년 남을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길을 내고 자연과 사람을 잇는 일은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라며 언론인으로서의 성취와는 또 다른 벅찬 감회를 전했다.

-기자생활 25년…첫사랑이 끝났다?

△어릴 적부터 책에 파묻혀 살았다. 아동문학, 주간지, 신문 등 활자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자연스럽게 글쓰기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동문학가를 꿈꾸다 사회의 모순을 글로 해결하고 싶어 기자가 됐다. 사회부, 교육, 여성 이슈를 발굴하며 사회의 목탁 역할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월간지에서 주간지로 옮기며 취재현장은 더 치열해졌고 부서는 원치 않았던 정치부였다. 밤낮없이 취재에 매달렸다. 열정은 국내 최초 여성 정치부장, 편집장이라는 타이틀까지 이끌었다. 주변에선 유리천장을 깼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목표가 아니었다. 기자로서 소명을 다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음 깊은 곳에 찰랑거리던 우물이 바짝바짝 말랐다. 결국 ‘번 아웃’이라는 현실에 직면했다.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나

△주간지 편집장 시절, 과도한 승부욕과 책임감에 시달리며 1년간 12건의 소송에 휘말렸다. 심신이 지쳐 병원을 찾았지만 특별한 병명은 없었다.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웠다. 의사의 처방은 간단했다. “스트레스 받지 마라, 과로하지 마라, 유산소 운동 한 가지를 일주일에 4~5번씩 하라” 운동이라곤 해본 적 없었기에 걷기를 시작했다. 처음엔 15분 걷기도 버거웠지만 점차 걷기가 삶의 일부가 됐다. 회사에서 화가 나면 밖에 나가 걸었다. 걷다 보면 다 잊게 되더라. 아웃오브 사이트, 아웃오브 마인드(out of sight out of mind).

-걷기가 가져다준 놀라운 변화는

△걷기를 시작하면서 마음을 비우게 되고 새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한계가 왔음을, 지쳤음을 인정하게 됐다. 우연히 접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책은 800㎞를 걷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사표를 내고 49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했다. 낭만적인 생각만 가지고 갔다가 중도 포기할까봐 등산화를 신고 12㎏ 배낭을 메고 매일 두 달간 여의도를 걸어 다녔다. 당시에 사표를 낸 것도 못마땅해하셨던 어머니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혼자 다른 나라에 간다는 걸 반대했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엄마 잘 다녀오세요’라고 지지해줘 무사히 순례길에 오를 수 있었다.

서명숙(오른쪽) 제주올레 이사장과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가 함께 활짝 웃어보이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제주올레의 시작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나에게 행복한 종합병원이었다. 걷는 동안 마음의 짐을 비워내고 자연 속에서 자아존중감을 회복했다. 길 위에서 만난 동행자들과의 우정, 각자의 사연을 나누며 서로 치유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순례길에서 만난 영국인 여성 ‘헤니(Henny)’와의 대화는 제주올레의 탄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인생을 뒤흔드는 강렬한 순간이었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헤니는 자신도 고향 영국으로 돌아가 산티아고처럼 ‘마을을 잇는 치유의 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나도 고향 제주에 이런 길이 생길 수 있게 글을 쓰겠다고 했다. 그때 헤니의 ‘사실 당신네 나라야말로 이런 길이 더 절실한 곳 아닌가요?’라는 말에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한국을 두 번이나 왔던 그는 서울이 정말 미친 도시 같았다고 했다. 모두가 숨 쉴 틈 없이 바쁘게 살고 건물은 높고 녹지는 별로 없는데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저녁에는 ‘힐링’이라며 술을 경쟁적으로 마시더라고 했다. 그렇게 바쁘고 경쟁적인 나라에서야말로 진짜 치유의 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순간, 내가 길을 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 그러면서 ‘각자 고향에 돌아가 우리만의 행복한 종합병원을 만들자. 자연과 사람이 이어지는 길을 만들자’라고 함께 약속했다. 결국 서울에서의 모든 삶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가 길을 내기 시작했다. 산티아고에서는 작은 마을 하나하나의 이름이 익숙해지듯 제주 200여 개 마을의 이름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바랐다. 자연과 문화를 그대로 두고 길로 이어주는 것만으로도 제주가 가진 자원이 빛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제주올레길 조성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행정의 지원없이 민간 주도로 이루어진 올레길 조성 과정은 주민 설득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마을 길, 개인 소유지, 목장 등 길 하나하나가 놓이는 곳마다 주민을 찾아 설득하고 협력을 구해야 했다. 어떤 곳은 낫을 들고 풀을 베며 옛 추억을 떠올리던 주민이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사람이 오가지 않던 언덕, 소풍 갔던 장소가 목장이 되기도 했다. 무성한 풀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길을 냈다. 이렇게 1코스가 열렸고 이후에도 27개 코스를 만들기까지 수많은 설득과 협력이 필요했다. 26코스까지 5년 4개월이 걸렸다. 이후에 27번째 길이 열렸다. 길을 내는 일은 단순히 지도 위에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을 잇는 일이었다.

-최근 올레길의 경제적 가치가 3175억원이 넘고 실제 가치는 조 단위를 넘어선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실제 수입은 어떤지

△길도 자식과 똑같아서 돈과 사랑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재정상황은 늘 여유롭지는 않다. 재정이 여유가 있으면 보완하고 다듬을 것들이 많은데 들어오는 수입에 맞춰 살림을 맞출 수밖에 없다. 유지관리만 하더라도 연간 최소 50억원 이상은 필요한 구조다. 입장료 없이 운영되는 올레길은 걷는 이들의 자발적 후원, 기업 후원, 디자인 제품 판매 등으로 운영비를 충당하고 있지만 연간 30억원을 넘기기 쉽지 않다. 물론 올레길 위 화장실이나 안전난간, 안내소 같은 큰돈이 들어가는 인프라 비용은 제주도나 서귀포시 같은 행정에서 예산을 세워 집행한다. 그게 연간 20억원 정도의 규모다. 행정은 미리 계획을 세워 큰돈이 들어가는 인프라를 개선하고 보완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길에서는 매일 수많은 일이 일어나고 그 일을 해결해야 매일 안정적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에 일상적인 유지관리에도 적잖은 돈이 필요하다.

자발성과 선의가 제주올레의 가장 큰 힘이다. 길을 걷고 감동 받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후원회원이 되고 기업들도 생태, 자연보전, 지역경제 활성화에 동의하며 후원에 참여한다. 아직 충분하진 않아 자생력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사무실 없이 10년을 떠돌다, 후원금과 성금으로 여행자센터를 마련했다. 현재는 사무국만은 20명, 관계법인 합하면 40명이 일하고 있다.

-제주도가 올레길 운영을 전적으로 맡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는데

△제주올레는 민간의 자발성과 선의, 열정이 만든 길이다. 행정이 주도하면 일관성과 지속성이 떨어질 수 있다. 공무원은 4년에 한 번씩 바뀌고 길의 가치를 이해하는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있다. 행정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지속 가능한 민간 주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동생과 둘이 시작해 사단법인을 만들었고 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이들이 뜻을 모았다.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제주 자연과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제주올레의 뿌리다. 앞으로도 민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며 행정과 협력할 부분은 협력하되 본질을 잃지 않으려 한다.

서명숙(오른쪽) 제주올레 이사장이 예종석의 파워인터뷰에 응답하고 있다. (사진=김태형 기자)
-제주올레가 한국 사회에 가져온 변화는

△올레길은 제주의 속살을 보여주고 여행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자동차로 휙 둘러보던 제주에서 걸으며 자연과 마을,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 대세가 됐다. 지역 주민도 소득이 높아지고 마을이 활기를 되찾았다. 무엇보다 걷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올레길은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지키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삶의 여유와 치유를 선물하고 있다.

-제주 올레길에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다. 캐나다 교포가 갓난아이를 안고 3년에 걸쳐 완주 중이고 90번이나 완주한 분은 안성과 제주를 오가며 7년간 길을 걸기도 했다. 우울증과 상실감에 빠졌던 분이 올레길을 걷고 삶의 의욕을 되찾은 사례도 있다. 올레길은 단순한 걷기 코스가 아니라 누군가에겐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누군가에겐 치유의 공간이 된다. 제주의 자연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제주올레의 고민은

△제주올레는 앞으로도 민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지키며 자연과 문화를 보전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너무 많은 사람이 찾으면서 길의 훼손과 변형이 생기고 있어 오름처럼 휴식년제를 도입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K올레길 해외 수출도 성과는

△해외 올레길은 일본 규슈올레와 미야기올레, 몽골올레가 있다. 해외 올레는 수출과 국제개발협력 모델로 나뉜다. 일본처럼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에는 올레길을 수출하고 몽골 같은 개발도상국에는 국제개발협력모델로 길을 선물로 주는 방식이다. 규슈올레는 현재까지 18개 코스, 미야기올레는 5개 코스, 몽골올레는 3개 코스가 열려 있다.

-큰 성과에 정부의 요직 제의도 있었는데

△주제 파악이 빠른 편이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제주를 떠날 생각이 없었고 제주가 가진 가치를 제대로 알리고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행정이나 정치가 아니라, 제주올레를 통해 제주를 세계에 알리고 자연과 문화를 지키는 일이 제게 더 맞는 길이었다.

-올레길에 그리는 미래는

△2007년 올레길을 처음 낼 때 사람들이 이 길에서 놀멍 쉬멍 걸으며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며 행복해지길 바랐다. 2022년 기준으로 그렇게 걸은 사람이 1000만명을 넘어섰을 때 제주올레는 스태프들이 회의를 거쳐 “우리는 걷는다, WE WALK”라는 새로운 미션을 세웠다. ‘놀멍 쉬멍 걸으멍’ 나를 돌보며 걸었던 사람들이 1000만명이 넘었는데 이 사람들이 이제는 나만을 위해 걷는 게 아니라 자연을 위해 걷고 이웃과 함께 걷고 지역을 위해 걷는다면 세상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새로운 미션을 잘 구현해 걷는 사람, 길 위에 사는 지역민, 길을 내어준 자연 모두 행복해지는 길로 지속 가능한 길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앞으로의 바람이 있다면

제주올레가 느림과 여유, 다양성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놀멍 쉬멍 제주올레길을 걸으며 지친 그대가 다시 힘을 얻길 바란다. 나는 걷기를 사랑한 사람, 제주를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서명숙 이사장 △1957년생 △고려대 교육학 학사 △시사저널 정치부 기자·정치팀장 △시사저널 취재1부장 △시사저널 편집장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현 시사IN 편집위원·제주 올레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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