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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노년의 기회와 선택

최은영 기자I 2025.04.25 05:00:00

최희정 웰에이징연구소 대표

[최희정 웰에이징연구소 대표]“요즘은 예순도 청춘이래.” 이 말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고령화를 바라보는 정서를 반영한다. 법적 기준으로는 65세 이상이 노인이지만 실제로 본인을 노인이라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23년 보건복지부의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노인이라고 인식하는 평균 연령은 73.1세로 나타났다. 이제는 70세가 넘어야 비로소 “이제 좀 나이 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이끄는 주체는 이른바 ‘신노년 세대’다. 이들은 일정한 소득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을 계획하고 건강과 여가, 배움에 대한 욕구도 뚜렷하다. 자녀에게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중심에 두고 ‘나답게’ 나이 들고 싶어 한다.

‘삼모작 인생’이라는 표현처럼 은퇴 이후에도 일하고 배우고 나누는 삶을 통해 인생을 적극적으로 설계하는 모습이 점점 보편화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화제를 모은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은 나이듦의 징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책이다. “심장이 뛰면 설렌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었다”는 식이다. 나이듦을 무겁게만 다루기보다 웃음과 함께 받아들이는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는 나이를 숫자로만 보지 않고 그 나이에 맞는 새로운 가능성과 여유를 즐기려는 문화가 확산하고 있다.

한국 사회 역시 이러한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 특히 삶의 기반이 되는 주거적 측면에서도 신노년 세대는 과거처럼 돌봄 중심의 노인시설에 만족하지 않는다. 실버스테이, 대학기반 은퇴 커뮤니티(UBRC)와 같은 새로운 주거 모델이 주목받게 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 또는 주거 형태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에는 식사와 생활 지원 같은 기본적인 서비스는 물론 평생학습, 문화예술 활동, 지역사회와의 교류 같은 요소들이 필수다. “나이 들어도 나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신노년의 삶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기준(New Normal)이 되고 있다.

‘에이징 인 플레이스’(Aging in Place)라는 개념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과제가 됐다. 이는 단지 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공간에서 독립성과 존엄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물리적 환경 개선과 함께, 사회적 관계 유지와 지역사회 연결망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물리적 환경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적 관계와 지역사회와의 연결망이 함께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는 ‘에이징 인 플레이스’가 아닌 ‘스턱 인 플레이스’(Stuck in Place·제자리에 갇히다)가 될 수 있다.

정부와 지자체, 민간이 함께 협력해 다양한 주거 선택지를 제공해야 한다. 특히 중산층 이상의 노인을 위한 실질적인 주거 옵션이 부족한 현 상황에서 공공임대와 고급 실버타운 사이를 메울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하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실버스테이 제도와 UBRC는 그러한 중간지대를 실현하기 위한 시도이며 신노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노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노년은 더 이상 후퇴의 시기가 아니다. 배움과 나눔, 자기표현이 가능한 시기이며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생애의 한 장면이다. 일본처럼 유머로 노화의 신호를 풀어내는 여유, 그리고 그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문화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이제는 ‘그저 나이 먹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잘 나이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웰에이징은 선택의 문제이며 그 선택이 곧 삶의 품격을 만든다.

국가와 사회는 이러한 선택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야 하며 신노년 세대가 각자의 삶의 방식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주거, 돌봄, 여가, 학습의 선택지를 마련해 제공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복지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뒷받침하는 사회적 책무이자 정책적 과제다.

나이 듦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 흐름을 부정하거나 숨기기보다는 삶의 한 축으로 품고 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신노년 세대는 이미 그 길을 걷고 있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그들의 여정에 함께 발맞추며 나이 들수록 더 ‘나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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