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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가장 먼저 화제가 된 건 ‘원테이크’로 찍었다는 점이었다. ‘소년의 시간’은 4부작으로 매회 카메라가 편집점 없이 그 현장을 따라다닌다. 첫 회는 소년의 집을 급습해 체포된 소년이 경찰서에서 신문을 받는 과정을 원테이크로 담았다. 난데없는 사건 앞에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지만 결국 유죄라는 걸 알게 된 아버지의 황망함과 무력감 그리고 절망감이 이 원테이크 안에 기막히게 포착된다. 2회는 소년의 학교를 찾아와 사건의 진실과 흉기를 추적하는 담당형사 루크의 시선을 따라가고 3회는 심리상담사 브라이어니 애리스턴(에린 도허티 분)이 제이미의 심리상태를 알아내기 위해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을 그린다. 4회는 생일을 맞은 에디와 그 가족의 하루를 통해 사건 이후 겪게 된 가족의 아픔과 상처를 들여다본다. 즉 첫 회가 벌어진 사건을 보여준다면 2·3·4회는 그 사건의 이유를 추적하는 것인데 그 시선은 모두 어른들의 관점이다. 하지만 그 어른들은 모두 그 이유를 완전히 납득지 못하는 무력감에 부딪힌다.
2회에서 학교를 찾아와 아이들과 인터뷰하며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루크는 계속 헛다리를 짚는다. 그러자 같은 학교 학생인 그의 아들이 나선다. “아빠는 애들이 뭐 하는지 못 읽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러면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그들만의 언어로 벌어지는 ‘사이버불링’(Cyberbullying·사이버 상의 욕설, 험담, 따돌림 등의 괴롭힘)을 이야기한다. 3회에서 심리상담사 브라이어니는 제이미의 갑작스러운 폭력성이 아버지 에디의 욱하는 남성성에 영향받은 것 아닐까 의심하며 추궁하지만 제이미는 그렇게 자신을 몰아세우는 상담사에게 분노하며 화를 내다가 상담이 끝났다고 하자 아이처럼 울며 매달리는 소년 앞에서 요령부득의 눈물을 흘린다. 소년은 남성성의 강박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아이라는 걸 보여준다. 4회에서 최악의 생일을 보낸 에디는 자신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맞으며 훈육받았지만 단 한 번도 아이에게 손을 댄 적이 없다며 안전하게 자기 방에만 있던 아이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한 통한의 눈물을 쏟아낸다. 남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와 SNS를 통해 벌어지는 어른들은 모르는, 사실은 관심을 두지 않은 아이들의 현실이 이처럼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드라마는 편집점 없는 원테이크로 보여준다. 원테이크는 그래서 그저 기술적 실험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 교차점들에 얼마나 쉽게 영향을 받는 ‘깨지기 쉬운’ 존재인가를 드러내는 연출적 선택으로 보인다.
‘소년의 시간’을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돈 것은 ‘이유’보다는 누가 그랬는가를 묻는 데 집착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단상이었다.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그리고 탄핵 정국이 길게 이어졌지만 결국 헌재에 의해 파면이 결정되자 우리는 그 모든 일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파면당한 대통령에 대한 기사들만 가득 채워진다. 어째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가에 대한 이유를 묻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논의 자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이어지는 대선정국은 누가 잘했고 못했고를 따지는 지루한 공방으로 이어지는 현실이 아닌가.
대중문화 전반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연예인 사건 사고에 대한 논란은 아찔할 정도다. 고인이 된 이선균과 김새론에 이어 김수현으로 이어진 일련의 논란들이 그렇다. 그런 일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원인을 찾아보려는 노력보다는, 누가 그 일을 저질렀는가에 좌표를 찍고 끝없이 비난을 쏟아내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래서 모든 사생활까지 낱낱이 끄집어 내져 공개재판하듯이 도마 위에 올려놓는 일들이 반복된다. 언론의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조회수 장사는 끝내 그 누군가가 스스로를 끝장내고 나서야 잠잠해지곤(요즘은 심지어 그 후에도 계속 공방이 이어지지만) 한다. 너무 많은 사건 사고들이 쏟아져 나와서일까. 우리는 너무 쉽게 비난할 누군가를 찾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가장 쉬운 선택이다. 잘못된 일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미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고 있지만 원인을 찾아 다시는 그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는 노력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서로가 촘촘하게 연결돼 작은 말 한마디도 영향을 주고받으며 좌표가 찍힌 누군가를 처참하게 무너뜨리는 초연결사회에서 논란과 비극은 반복된다. 누가 그랬는가를 찾아내 처단하려 하기보다 ‘왜 그랬을까’ 원인을 들여다보려는 치열한 고민을 우리도 해야 하지 않을까. ‘소년의 시간’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