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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선친 고(故)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29주년을 맞은 7일 서울 김포 비즈니스항공센터에서 유럽행(行) 전세기에 몸을 싣는다. 이달 18일까지 장장 10박12일의 대장정이자, 지난해 11월 미국·중동 방문 이후 약 6개월 만의 해외출장이다. 이를 위해 그간 개근을 해왔던 10일·16일 예정된 두 차례 재판 일정까지 뒤로 했다. 재계 안팎에선 유럽 내 글로벌 네트워크를 복원하고, 현지 사업을 재점검하는 한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바이오·인공지능(AI) 등 미래 먹거리 발굴 및 인수합병(M&A) 논의의 보폭을 넓힐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최근 450조원 규모의 투자 보따리를 풀면서 내던진 “그냥 목숨 걸고 하는 것”이라는 발언에서 볼 수 있듯, 이번 출장을 앞둔 이 부회장의 각오가 만만치 않다는 게 삼성 안팎의 평가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반도체 초미세공정의 핵심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독점 생산하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을 정조준하고 있다. 2020년 10월 출장 때처럼 ASML 본사를 찾아 피터 버닝크 최고경영자(CEO) 등과 협력방안을 논의할 공산이 크다. 슈퍼 을(乙)로 불리는 ASML과의 담판을 통해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대만 TSMC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미다. 시장에선 올해 ASML의 EUV 출하량 51대가량 중 삼성은 18대, TSMC가 22대를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누가 더 빨리, 많이 EUV를 확보하느냐가 관건인 만큼 삼성과 TSMC 간 확보전은 더욱 치열해지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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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이 네덜란드·영국·독일을 넘어 벨기에로 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또는 의회 인사를 만날 가능성도 거론된다. EU는 2030년까지 총 450억유로(약 59조9000억원)를 투자해 유럽 지역 첨단 반도체 생산능력을 갖추고 전문인력을 육성하는 내용을 담은 ‘유럽 반도체법’을 발의하는 등 반도체를 안보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를 통해 현재 9% 수준인 유럽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는 게 EU의 목표다. 다른 관계자는 “작년 11월 미국·중동 출장 당시 브라이언 디스 미국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 등을 만난 것처럼 이 부회장이 EU의 경제·안보 고위관료들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라며 “반도체를 포함한 공급망 안정화 등 파트너 역할에 대한 얘기가 오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가석방 신분인 이 부회장이 아직 선친의 ‘신경영 선언’ 이상의 메시지를 내긴 어려운 처지”라며 “이번 유럽 출장을 계기로 사면론이 더 분출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