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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1일` 소련 쿠데타 실패..우크라 독립[그해 오늘]

전재욱 기자I 2022.08.21 00:03:00

소련 공산당 보수파가 일으킨 쿠데타로 고르바초프 실권
내부 지지 못받고 서방의 제재로 나흘 만에 막내려
공산당 해체하고 연방 공화국 독립하며 소련 해체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미국이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지지하는 성명을 1991년 8월19일 발표했다. 발단은 전날 일어난 소련 쿠데타였다. 이로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실각하자 미국이 나선 것이다. 당시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성명에서 소련 쿠데타 세력을 비난하고 경제 제재를 예고했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 당시 시민이 장갑차에서 군인을 끌어내는 모습.(사진=위키피디아)
냉전 시대를 상징하고 지금도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두 나라가 협력한 모습은 참으로 생경하다. 소련 쿠데타 세력은 바로 이런 분위기를 명분으로 삼아 행동에 나섰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초대 대통령으로서 실권을 행사해온 고르바초프는 군비를 축소하고 서방과 교류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종식한 인물로서 훗날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소련 공산주의의 실패를 인정하고 자본주의를 도입하려는 개혁의 일환이었다.

직격탄을 맞게 된 소련 공산당 보수파는 생각이 달랐다. 당시 동유럽 혁명으로 공산권이 붕괴하고 소련 연방 소속 발트 3국은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를 지향하고 공산주의를 등지려고 하는 고르바초프는 눈엣가시였다.

쿠데타는 고르바초프가 크림 반도로 휴가를 떠난 1991년 8월18일 터졌다. 그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에 합의한 직후에 감행됐다.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 등 쿠데타 주역 8인은 고르바초프에게 하야를 강제했고 거부하자 별장에 연금했다. 그리고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넘겨받았다. 수도 모스크바에는 쿠데타를 지지하는 군부의 탱크가 진입했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항의하는 소련 시위대.(사진=위키피디아)
쿠데타는 세력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내외부 모두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 소련 연방 소속의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쿠데타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대중의 지지를 받아온 옐친의 촉구에 시민들이 반응했다. 파시즘에 맞서는 시위가 도심 곳곳에서 열렸다. 서방은 평화를 지지해온 고르바초프가 실권하자 경제 제재로 맞섰다. 교황청도 고르바초프의 지지를 선언했다. 쿠데타 세력 지지가 예상된 중국 공산당은 침묵했다.

궁지에 몰린 쿠데타 세력은 안에서부터 분열했다. 결국 쿠데타는 나흘 만에 막을 내렸고 고르바초프는 1991년 8월21일 자리에 돌아왔다. 쿠데타 실패 나흘 뒤 소련 공산당은 해체됐다. 소련이 내분하는 사이 연방 소속 주요 공화국이 속속 독립을 추진했다. 발트 3국 독립도 승인됐다. 우크라이나 독립도 쿠데타에서 비롯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1991년 8월24일 독립을 선언했다. 쿠데타가 막을 내린 지 사흘 만이었다.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결국 1991년 12월26일 해체됐다. 그리고 출범한 독립국가연합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옐친은 쿠데타로 얻은 지지를 토대로 고르바초프를 넘어서는 권력을 행사했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1999년까지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다.

8월 쿠데타는 소련 체제를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결과는 소련의 해체였다. 이로써 냉전 시대가 종식했는데, 그 명분이 쿠데타라는 게 아이러니다. 고르바초프가 쿠데타 세력에 연금된 별장이 현재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 있는 것이 공교롭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격전지 삼아 전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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