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시 한 줄의 위로가 필요한 때

최은영 기자I 2018.12.14 05:00:00
[이데일리 최은영 소비자생활부장]‘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올해 치러진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 시험에 등장한 수험생 필적 확인 문구다. 필적 확인 문구는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지난 2006학년도 수능에서 처음 도입됐다. 윤동주의 ‘서시’를 시작으로 이번 김남조의 ‘편지’까지 매년 다양한 시구가 수능 필적 확인 문구로 쓰였지만, 이번만큼 수험생에게 위로가 되는 글귀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쟁사회다. 평가는 필요하다. 매년 연말이면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노고를 평가 받는다. 고과, 승진 등 희비는 일순간에 갈린다.

시 한 줄의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 어디 수험생뿐이겠는가. 대입이라는 과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고, 인생은 꼭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평가 앞에서 우리는 늘 초조해진다.

언론인으로 최근 가장 많이 접하는 기사는 인사 관련이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임원들은 무척이나 예민해진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의 임원은 단종 된 현대차 ‘아슬란’을 이야기하며 “차는 좋은데 이름을 잘못 지었다. 가뜩이나 연말이면 아슬아슬해 죽겠는데 임원들이 주로 타는 차 이름이 아슬란이 뭔가”라고 했다.

최근 LG그룹은 승진 잔치를 벌였다. 무려 134명의 신임 상무가 선임됐다. 2004년 계열 분리 이후 역대 최대 규모라고 한다. 승진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나가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기업들의 인사 발표에 퇴직자 명단은 없다. 승진자만 기록한다. 이런 이유로 인사 발표가 나면 해당 기업에 다니는 지인의 안위를 파악하기 위해선 주변인의 도움을 다시 받아야 한다. 주로 뒤에서, 알음알음으로, 조심스럽게 묻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늘 제가 다니던 회사에 ‘퇴임신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 덕분에 즐거웠고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는 직장인이 아닌 일반인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이달 초 국내 기업에서 대표로 일해 온 한 지인은 업계 동문들이 모인 단톡방에 이렇게 먼저 용기 내 퇴직인사를 전했다.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먼저 위로의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평가를 받는 사람도 그렇지만, 하는 쪽도 마음이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오랜 노고에 보상을 받기도 하지만, 또 한편에선 깊은 패배감에 절망하는 이들이 있다. 주변인의 입장에선 축하를 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게 위로다.

다시 수능 얘기로 돌아가서, 올해 시험을 본 학생들은 손 글씨로 답안지에 김남조 시인의 ‘편지’ 첫 구절을 한자 한자 적으며 울컥 하는 감정을 느꼈을 게다. 바스러질 듯 메말라 버린 수험생들의 가슴이 잠시나마 촉촉해졌을 것이다. 아름다운 시 한 줄의 힘이다.

안타깝게도 올해 수능은 역대 가장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불수능’이라고 불릴 정도다.

수험장을 나오면서는 ‘편지’의 시구가 다르게 읽혔을지 모르겠다. ‘오늘만큼 어려운 시험을 본 일이 없다’고.

인생은 그렇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이 또한 지나가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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